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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혁명의 러시아사] 예카테리나 여제의 개혁 정치

by 김고기 님 2023. 7. 27.

<목차>

 

I. 근대 러시아의 탄생

  1.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
  2.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3. 예카테리나 여제의 개혁 정치


전체 목차 및 참고문헌 보기

 

 

여러 의미에서 급진적이었던 표트르 대제의 전제 정치가 끝나고, 러시아는 한동안 혼란에 휩싸인다. 이 혼란은 표트르 대제 사후 40여 년 만에 나타난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에 의해 비로소 정리된다. 이 여황제의 재임기에는 대체적으로 표트르 대제와 유사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은 표트르 대제가 귀족들을 국가에 봉사하는 특권계층으로 사고했음에 비해, 예카테리나 2세는 순수한 특권계층으로서 귀족의 권리를 상당부분 확대하고 보장하였다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가 귀족들에게 부여한 부역, 예컨대 행정 관청이나 군에서 복무해야 하는 의무 등은 이 시기 대부분 사라진다.

 

혁명을 향한 여정에서 이 시기가 갖는 의미는 대대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사유재산의 보호가 명문화된 것이다. 수출세가 폐지되어 대외무역이 활기를 띄었으며, 공장 설립 자유령으로 18세기 말까지 약 1,200개의 공장이 새로 생겨났다. 그녀는 신흥 공업의 발전이 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공업에 대한 광범위한 육성과 지원은 새롭게 태동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짜르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집권 초기 예카테리나 2세는 스스로 계몽 군주를 자처할 만큼 계몽사상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재임기에 농노제는 더욱 공고화되었으며, 공업의 육성 또한 농노제를 근간으로 이루어진다. 농노에 대한 착취 또한 더욱 강화되어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농민 반란인 ‘푸가초프의 난[3]’을 맞는 원인이 된다. 이 사건 이후 정부와 귀족은 농노와 농민에 대한 억압을 체계화하게 되고,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사상을 철저히 버리는 한편 농노 해방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계속)

[3] 돈 카자크의 지도자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농민과 여러 소수 민족을 이끌고 예카테리나 2세에 저항한 반란(1773~1775). 예카테리나 2세의 친귀족·친독일 정책은 농노·농민들의 저항을 불렀고, 자치권 제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카자크인,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등 소수 민족이 합세하면서 대대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 초기 푸가초프 세력은 볼가강과 우랄산맥을 따라 급격히 커져가는 듯했으나, 러시아 정부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자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후 푸가초프가 체포되어 사형당함으로써 반란은 막을 내린다.

 

그레고리 먀소예도프&#44; 추수기
<그림 4> 추수 중인 농노의 모습을 담은 먀소예도프의 그림. 그레고리 먀소예도프(1834~1911)은 농노 가까이서 그들의 삶을 묘사한 그림을 여럿 남겼다. (그림: 그레고리 먀소예도프, 1887, <추수기>, 캔버스에 유채, 275×179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사실 당신들(계몽사상가들)의 논리는 모두 어리석은 국민들의 논리가 아니오?
게다가 그 논리가 프랑스에 영광을 가져다 준 것도 아니지 않소?


―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 

 

요한 밥티스트 람피&#44;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
<그림 5> 표트르 1세에 이어 '대제'의 칭호를 받은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 (그림: 요한 밥티스트 폰 람피 더 엘더, 1780년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85.5×68cm, 빈 미술사 박물관)

 

 

※ 이 글은 2013년 7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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