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근대 러시아의 탄생
-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
-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 예카테리나 여제의 개혁 정치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가지는 의미는 게르만 왕국에 미치지 못한다.
─ 르네 데카르트(1596~1650) ─
17세기 초의 러시아는 이미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국가였지만, 하나의 폐쇄된 국가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내륙 국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북극해와 태평양은 혹한 때문에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발트 해로 향하는 길목에는 스웨덴이, 흑해로 향하는 길목에는 투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러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길을 직접적으로 차단해버린 이 두 나라는 걸핏하면 러시아를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인식은 미개하고 낙후된 야만 국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실제 러시아의 모습도 이러한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축물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비가 오면 길이 진흙으로 변해 고립되길 일쑤였다. 귀족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드물었으니 평민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도 모스크바에서조차 글을 아는 사람이 100명 중 3명이 채 되지 않았다.
특히 민중들의 생활은 더없이 참혹했는데, 러시아 국민의 90%[1]를 차지하는 농노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 힘든 노동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상황이었다. 절반이 넘는 아이들은 한 살을 채 넘기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으며 40세까지 목숨을 연명한 이들은 대단한 행운아로 여겨질 정도였다.
[1] 러시아의 인구 통계는 영토의 광범위함과 잦은 영토 변동,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해 학자에 따라 지극히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와 마크 D. 스타인버그가 집필한 『러시아의 역사』(2011)의 수치를 따른다.
기술 발전에서도 매우 후진적이어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주요 기술은 외국의 기술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군함의 지휘관까지도 외국에서 초청해 왔는데,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을 하거나 적에게 투항해 버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이후 ‘대제’란 칭호를 얻는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다. (계속)
※ 이 글은 2013년 7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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