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사회/역사

[혁명의 러시아사]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by 김고기 님 2023. 7. 19.

<목차>

 

I. 근대 러시아의 탄생

  1.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
  2.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3. 예카테리나 여제의 개혁 정치


전체 목차 및 참고문헌 보기

 

 

17세기 러시아의 대외 정책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차르와 정부는 무엇보다 자국민들이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힘썼다. 당시 러시아 대도시 근처에는 외국인 마을이 세워지곤 했는데, 이는 자국민들이 외국인과 직접 만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정책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는지 당대 러시아 국민들은 외국인을 매우 두려워하고 배척했는데, 외국인이 방문한 마을에선 집안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한 다음 신부에게 다시 세례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표트르는 당시 국민들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행동을 감행하는데, 바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낙후된 원인이 지리적·정신적·문화적 폐쇄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민중들은 표트르의 유럽행에 경악했다. 심지어는 황제가 유럽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운 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 표트르 1세(1672~1725) ―

 

폴 들라로슈&#44; 표트르 대제
<그림 2> 근대 러시아의 토대를 완성하고 이후 '대제'라 불리는 표트르 1세의 초상. (그림: 폴 들라로슈, 1838, <표트르 대제>, 캔버스에 유채, 130.6×97cm, 함부르크 미술관)

 

표트르가 유럽으로 떠난 것은 18세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다. 당시 유럽은 이미 스페인이 저물고 네덜란드의 해양패권이 빛나던 시기였다. 영국은 입헌 군주제를 완성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전제 군주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황제가 아닌 일반인 신분으로 유럽에 유학한 표트르는 공장에서 일하며 유럽이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대대적인 개혁 작업을 벌여 러시아 체제를 처음부터 새롭게 정비했다. 개혁이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부분은 군사 기술을 비롯한 조선 기술과 해양 기술로, 이는 발트 함대를 구축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의도가 한껏 반영된 것이었다.

 

혁명을 향한 여정에서 이 시기가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많은 공장이 건설됨으로써 매뉴팩처의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수공업 공장은 눈 깜짝할 새에 240여 개로 늘어났으며, 그간 수입에만 의존하던 철 역시 1725년에는 해외로 수출을 하게 된다. 이로써 1680년에 150만 루블 정도였던 국가 수입은 1725년경에는 900만 루블까지 늘어난다. 중공업, 제철, 제련, 광산업과 관련된 많은 수의 공장이 들어섰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조선소가 들어선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할 점은, 이 공장들이 건설된 목적이 군사상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대북방 전쟁[2]에서 스웨덴에 승리를 거둔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유럽 국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땅에 새워진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중심이 유럽으로 옮겨갔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표트르 1세는 부국강병을 위해 수많은 개혁 정책을 시행했었지만, 개혁의 결과물이 평민 계층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농노에 대한 착취와 전제 군주제는 더욱 강화되어 제국으로서 입지를 다진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는 주변 상업 대국들과 정기적인 교역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유럽 열강 대열에 합류한다.

[2] Северная война. 1700년부터 1721년까지 러시아 차르국과 스웨덴 제국이 발트해의 지배권을 두고 맞붙은 전쟁. 두 나라와 더불어 러시아 측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로이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등이, 스웨덴 측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카자크 헤트만국이 참여한 국제적 전쟁이었기에 '대북방 전쟁'이라는 고유 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스웨덴은 발트해 해안 영토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유럽 열강 경쟁에서 탈락하고, 바다로 진출할 통로를 확보한 러시아는 동유럽의 신흥 강대국으로 대두하게 된다.

 

제국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조세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세금과 부역의 조달을 위해 인구 총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농민들을 토지에 결박시키는 정책을 편다. 이를 기반으로 기존의 호구세(가구 단위로 부여)를 인두세(사람 단위로 부여)로 개편하고 온갖 특별세를 부과하여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농노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징수 책임은 그들 주인에게 맡겨졌다. 농노는 얼마든지 양도·매각·교환이 가능한 존재로,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계속)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노라.

―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 ―

 

바실리 트로피닌&#44;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초상
<그림 3>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꼽히는 푸슈킨의 초상. (그림: 바실리 안드레비치 트로피닌, 1827,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8.2×55.8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이 글은 2013년 7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letter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