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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정치학

[민주주의의 반대자들] 4. 가세트·탈몬: 대중정치는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by 김고기 님 2023. 6. 13.

<목차>


  1. 플라톤: 민주주의는 나쁜 정부를 산출하게 된다
  2. 엘리트주의자: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환상이다
  3. 고전적 자유주의자: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적이다
  4. 가세트·탈몬: 대중정치는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5.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6. 나오며: 그들은 왜 민주주의를 비판했나?

 

가세트: 대중의 저급한 본능에 권력을 쥐어주어선 안 된다

 

대중 정치의 시대가 열린 이후 대중론은 여러 사상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연구 주제였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는 『대중의 반란』(1930)에서 대중을 본질적으로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파악했으며, 이들에게 권력을 준 민주주의가 사회에 해악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중민주주의가 대중의 가장 저급한 본능에 호소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비판했으며, 대중민주주의가 불러오게 될 시민사회와 도덕 질서의 붕괴를 우려했다. 이는 플라톤의 견해를 근대 민주주의에 맞춰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저서 대중의 반란
<그림 11>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그의 저서 『대중의 반란』. 대중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시도한 그의 연구는 사회학계의 큰 주목을 불러 모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흥미로운 사실은 가세트의 이러한 논리가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 양측에서 공히 발견된다는 점이다. 보수 세력은 촛불 집회와 같은 일련의 대규모 여론을 비판하며 이 논리를 사용했고, 진보 세력은 이명박·박근혜의 당선을 조소하며 같은 논리를 동원했었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권위주의에 대한 지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보수 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세력으로서 보수 권위주의, 진보 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진보 권위주의 지지자들의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가 경제적 영역에서 대립해도, 정치적 영역에서는 서로 동일하게 권위주의를 추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등의 대립에서 어느 한쪽이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특히 보수 세력 사이에서 대중민주주의 비판 논리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이론적 기반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론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셈이니,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탈몬: 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제이콥 탈몬(Jacob Leib Talmon, 1916~1980)은 대중의 선호에 대해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1952)에서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들이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폭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제이콥 탈몬
<그림 12> 제이콥 탈몬의 초상. 유대인인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출처: Alchetron)

 

탈몬은 특히 루소의 '일반 의지'에 주목한다. '일반 의지'에 따라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동일시된 민주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견을 존중하는 대신, 인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러현 현상이 바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다. 그리고 '일반 의지'를 표상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독재 세력이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나타났듯 그러한 세력은 많은 경우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탈몬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경계한다. 그가 분석한 맥락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란 '일반 의지'에의 이견 없는 예속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
<그림 13>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초상. 20세기 초까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쌓은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으나, 세계가 전체주의의 도래를 목도한 이후 탈몬과 러셀 등을 중심으로 재해석이 시도되었다. 다만 근래 들어 루소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거나, 오해라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지고 있는 추세다. (그림: 캉탱 드 라 투르, 18세기, <장 자크 루소의 초상>, 종이에 파스텔, 45×35.5cm, 앙투안 레퀴에 미술관)

 

탈몬의 민주주의 연구는 특히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민주주의 대 독재, 또는 민주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간편한 대립 구도를 넘어 민주주의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요소를 지적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를 구성하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즉, 그는 18세기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을 20세기 중반 세계를 위협한 전체주의 국가(독일과 소련)의 사상적 기반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탈몬의 분석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 오도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특히 자유주의 진영에서) 그간 민주주의가 아닌 것(스탈린주의, 나치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으로 취급되던 사상에 내재된 민주주의 요소를 지적함으로써 보다 민주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를 제시하는 한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풍부화한 공로만큼은 분명하다. (계속)

 

 

<참고문헌>


앤드루 헤이우드, 2007, 『현대 정치이론』, 이종은·조현수 옮김, 까치글방.
양재인, 1990, 『한국정치엘리트론』, 대왕사.
얼빙 짜이틀린, 2006, 『서회학 이론의 발달사』, 이경용·김동노 옮김, 한울아카데미.
윌리엄 사하키안, 2003, 『서양철학사』, 권순홍 옮김, 문예출판사.
임지현, 2013,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의어인가?」, 『서양사론』 제116호, 한국서양사학회.

 

 

※ 이 글은 2010년 8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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