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내 우상은 칸노 요코, 핫토리 타카유키, 히사이시 조였다. 세월이 지나며 이런저런 현실적 한계로 지금은 다른 분야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만들어진 취향과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라.
학창 시절, 또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나에게 일본 게임 업계는 다른 차원의 장인들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한국 콘텐츠 업계가 점점 두곽을 나타내더니, 어느새 일본과 경쟁할 만한 수준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변화를 체감하는 와중에도 사실 중국 게임 업계에 대해서만은 깊은 불신과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의 저력을 체감하고 있다. 압도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양산형 콘텐츠를 통해 세계 게임 시장을 휩쓸고 있단 소식은 2017년 즈음 부터 쭉 들어왔지만, '양산형'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예술적인 면과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결코 한국과 미국, 일본을 쉽게 넘어설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양산이 극에 달하니 그 이상을 노리게 된 것일까? 최근엔 그 감성적인 면, 예컨대 세계관 구축이나 서브 콘텐츠 제작, 각종 컬래버레이션과 마케팅에서도 굉장한 결과물을 내놓는 걸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머지 않아 중국 게임산업이 완성도나 예술성은 물론 문화를 선도한다는 측면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넘어설 수 있겠단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시장 점유율이 개별 상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건 아니겠지만, 코로나19 확산 시기 게임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는 와중 중국은 거의 유일하게 자신들의 비중을 유의미하게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일본과 유럽의 점유율을 가져간 모양새다. 어마어마한 내수시장이 만든 착시가 상당하다 가정하더라도, 기존의 충성도 높은 일본·유럽 게임 팬들을 유입시키는 데 성공한 모양새다.
특별히 시선이 가는 회사는 단연 miHoYo(미호요)다. <원신>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분명히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의 표절로만 보였는데, 시간이 흐르고 독창적인 요소가 추가되는 걸 보니 표절이라 규정하고 끝낼 수 없는 영역도 있었다. 애초에 이런 식의 모방은 과거 한국 게임산업이 그랬듯, 시장이 고도화되면서 점점 해결돼 나갈 것이다.
이제 기술적인 면이나 시스템적 요소에서 중국 게임을 저평가하는 건 확실히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인상 깊고 또 부러운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만든 캐릭터와 구축한 세계관을 정말 아끼고 즐기는 게 느껴진단 점이다. 이 정도 수준의 스토리와 음악과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나아가 꾸준히 배포하고 홍보하는 것 역시 그런 '즐김'의 일환일 테다. 그러니까 이제 중국 게임 업계는 '고객'과 '유저'를 넘어 '팬'과 '오타쿠'를 만드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미호요의 창업자들이 스스로 <에반게리온>의 광팬을 자청하는 것처럼, 다음 세대는 <원신>과 <붕괴> 시리즈의 팬들이 이끌게 될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2022년 3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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