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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서평] 『제국의 미래』: 관용이 제국을 만든다

by 김고기 님 2024. 3. 9.

미리 세 줄 요약

 

① 『제국의 미래』(2008)는 2,500년 인류 역사를 '관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되돌아본다. 이를 통해 "다원주의적 관용", 즉 다른 국가·민족·인종을 포괄하는 관용을 가진 국가만이 '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② 미국이 현대의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이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위해 새롭게 건국되어 이민자들로 구성된, 본질적으로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국가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 '관용'이 줄어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이 몰락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진단한다.

 

③ '관용'의 관점에서 저자는 다음 제국의 후보로 '인도'를 제시한다. 관용이 정말로 제국을 만드는 독립변수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의심스러우나, 최소한 문화적 다양성이 국가의 발전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목차>


  1. 들어가며: 미국 패권의 몰락 vs. 제국의 미래
  2. 제국의 조건
  3. 몰락하는 미국에 대한 두 입장
  4. 새로운 제국의 후보들
  5. 나오며: 제국의 미래가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1. 들어가며: 미국 패권의 몰락 vs. 제국의 미래

 

근대 이후 '제국'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고통을 준 관념이었다. 제국의 정의가 무엇인가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지만, 오늘날 제국의 실례로 '미국'을 제시하는 데 이의를 가진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국의 미래』(2008, 원제: Day of Empire: How Hyperpowers Rise to Global Dominance and Why They Fall)는 『미국 패권의 몰락』(2004, 원제: The Decline of American Power: The U.S in a Chaotic World)과 함께 읽을 때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의 논의는 월러스틴의 문제 제기와 연관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미국의 몰락을 예견·경고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주장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 만큼 구체적으로 두 학자의 견해가 어떤 점에서 같고 또 다른지 알아보자.

 

이 책이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사실상 책의 핵심인 "다원주의적 관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때문이다. 최근엔 세대별·성별 갈등이 극한에 치달으며 오히려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2010년 전후 가히 제노포비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반 다문화 열풍이 한국 사회에 몰아쳤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는 날조된 외국인 범죄 사례가 수많은 추천과 함께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에이미 추아&#44; 제국의 미래
<그림 1> 에이미 추아, 2008, 『제국의 미래』, 이순희 옮김, 비아북.

 

한국이 제국이 될 거란 생각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다가올 또 다른 2,50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확언할 수 있겠는가?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오히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를 필두로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한국이기에 이 책의 문제제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지금이 정말로 "이행의 시대"라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제국의 미래』를 검토해야만 한다.

 

2. 제국의 조건

 

지난 2,500여 년의 역사를 포괄하는 이 책의 흐름은 명쾌하다. 제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세계사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흥망성쇠의 열쇠가 바로 '관용'이다. 저자는 페르시아-아케메네스, 로마, 당, 몽골이라는 고대 제국에서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이라는 근대 제국, 그리고 현대 제국인 미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제국이 되었고 또 어떻게 몰락하였는지를 '관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오스만, 명, 무굴, 그리고 독일과 일본 등 제국이 되고자 했으나 좌절된 국가의 역사 역시 함께 진단하며 관용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국의 조건에서 정확히 '관용'이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는 우선 제국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먼저 그 나라의 권력이 다른 경쟁국들의 권력을 분명히 넘어서야 한다. 두 번째는 다른 나라를 넘어서는 군사력 또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권력이 일부 특정한 지역이 아닌 방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민족, 인종만으로는 조성될 수 없다. 이는 세계 각지, 각국의 인재들이 참여하고 그들의 능력을 펼쳐낼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추아의 진단이다. 이들 인재를 위해 종교적·인종적 관용이 필요하고, 바로 이것이 제국이 가진, 제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관용'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서기 117년 로마의 영역
<그림 2> 서기 117년 로마의 영역. 일반적으로 제국은 '다지역, 다민족을 통합하여 통치하는 국가'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러한 제국을 이렇게 인식하면 통합된 결과에만 집중하고, 그 과정은 도외시하게 된다. 추아의 접근은 애초에 다민족을 통합할 수 있었기에 제국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얼핏 과거의 제국들이 '관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저자 역시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 그가 제시하는 관용은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관용이 아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용이다. 즉, 페르시아를 비롯한 과거의 제국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당연히 관용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동시대 다른 경쟁국들에 비해서는 훨씬 관용적이었기에 제국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제국인 미국은 어떻게 제국이 되었을까? 추아는 미국이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위해 새로이 건국된 나라라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그 성립과정에서부터 이민자들의 역할이 지대한 나라였다. 따라서 미국은 본질적으로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더해 미국 내부에서의 지속된 시민권 운동이 미국을 동시대 다른 국가와 비교해 고도로 관용적인 국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300이 묘사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모습
<그림 3> 영화 <300>(2006)이 묘사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모습. "나는 관대하다."라는 대사로 일약 밈이 되었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그는 매우 관대한 왕이자 어마어마한 대제국의 주인이었다.

 

3. 몰락하는 미국에 대한 두 입장

 

월러스틴은 미국 패권의 확연한 성립을 2차대전 이후로 보고 있지만, 추아는 1990년대부터 미국이 제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본다. 월러스틴은 1960년대부터 이미 미국 헤게모니가 기울고 있다고 분석하지만, 추아는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변화로 인해 미국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입장을 비교할 수 있는 결정적 차이이다. 즉, 두 학자가 분석한 미국의 최전성기가 다르다는 점이 핵심이다.

 

추아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추진하게 된 일련의 정책들이 미국 사회 관용을 제한함으로써 미국을 몰락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모습이 미국 쇠퇴에 대한 상징이며, 또한 동시에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9·11 테러가 온전히 이러한 문제의 독립변수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월러스틴의 관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9·11 테러가 미국의 일련의 대중동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9·11 테러보다 테러가 일어나게 된 동인이고, 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보다는, 미국이 그러한 대응을 선택하게 된 동인이다. 아쉽게도 추아의 논의 전개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의 맥락에서 "군사적 우위로만 지탱되는 미국 헤게모니"라는 월러스틴의 분석이나, "세계 헤게모니는 축척체제와 국가간체계의 결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아리기의 분석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이 애국자법을 비판하는 장면
<그림 4>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이 애국자법(테러대책법)을 비판하는 장면. 애국자법(USA PATRIOT Act)은 추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미국 사회가 퇴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로 제시되었다. 애국자법은 수많은 논란 끝에 2015년 일부 독소조항이 삭제된 자유법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월러스틴이 과도하게 구조에 집중한 전체론적 시각을 보여 주었다면, 추아의 주장에서는 구조적 사고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차이일까? 오로지 '관용'이라는 주제에 입각해서 진행되는 논의 전개는 쉽고 재미있으며, 때로는 치명적이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어떤 면으로는 확증편향적이기까지 하다. 이민자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역할이 발전에 미친 영향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나, 정작 그것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은 생략된다. 다원주의적 관용은 정말로 제국으로 등극하고,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독립변수로서 역할을 수행하는가? 다원주의적 관용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는 없는가? 관용의 정신을 논하기 전에 이에 대한 분석이 먼저 필요해 보인다.

 

4. 새로운 제국의 후보들

 

월러스틴에 비해 추아의 접근이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꼽는다면 단연 11장이다. 이 장에서 추아는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이라는 제목을 통해 미국 이후 새로운 제국의 후보자들을 검토하고 있다. 월러스틴이 "누구도 알 수 없는 이행의 시기"라는 표현으로 미국의 몰락 이상의 예측을 피해간 반면, 추아는 자신이 제시한 분석틀을 통해 미국 이후의 제국에 대해 예측함으로서 논의의 완결성을 꾀한다. 추아가 제시한 후보자들은 중국, 유럽연합, 인도이다.

 

먼저 추아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과 각계의 긍정적 예측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뿌리 깊은 자민족중심주의로 인해 제국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할 것으로 평가한다. 유럽 연합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 무엇보다 엄격한 이민 정책이 그들에게 한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 행사에서 오성홍기를 흔들고 있는 링링허우 세대 학생들의 모습
<그림 5> 중국 정부 행사에서 오성홍기를 흔들고 있는 링링허우 세대 학생들의 모습.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의 Z세대에서는 애국주의가 강화되는 양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 조선일보)

 

결과적으로 추아가 제시하는 차기 제국으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인도이다.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인도 역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 당연하게도 추아가 가장 주목하는 영역은 인도의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이다. 그는 인도가 가진, 인도가 인정하는 다양한 언어, 종교, 인종이야말로 인도를 차세대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초석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다원주의적 관용이 정말로 독립변수로 기능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부족한 상황에서, 추아의 접근은 한계가 커 보인다. 오히려 추아의 논리를 역으로 적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도성장 과정에 있는 축척체제가 다원주의적 관용을 동원한다, 즉 다원주의적 관용이 그들을 제국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제국이 되고 있었기에 다원주의적 관용을 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국이 되기 위한 경쟁에서 관용 변수와 경제력·군사력 변수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

 

5. 나오며: 제국의 미래가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지금까지 검토한 대로, 추아의 주장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발견된다. 그러나 다문화와 다원주의가 그간 주로 발전의 부작용, 혹은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만 하는 현상으로 논해지던 것에 비해 이를 발전을 위한 전면적인 동력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추아의 문제 제기는 굉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유럽과 북미를 비롯해 이른바 고도로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마저도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창궐하는 세태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가 추아의 논의를 수용한다면, 그것은 한국이 제국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논의의 범위를 줄였을 때 더 현실적이고 적실성 있는 접근이 가능하다. 그저 지금보다 더 잘 살고 더 잘 발전하기 위해 문화적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지닌 다양한 인재들은 제국의 조건이기 이전에 발전의 조건이다.

 

실리콘 밸리 주요 기업들의 인종 구성
<그림 6> 실리콘 밸리 주요 기업들의 인종 구성. 분명히 말하지만 이 도표는 단독으로 어떤 당위를 말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미국 인구의 10%를 구성하는 아시아인이 왜 최고 IT 기업에는 30% 가까이 재직하고 있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걸 잘못 해석하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이 '특혜'를 받고 있단 결론에 이르게 된다. (출처: TechCrunch)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동의한다. 그렇기에 세계 어느 곳의 문화도 동시에 가장 세계적이다. 생물에 다양성이 필요한 만큼, 문화에도 다양성이 필요하다. '제국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다원주의적 관용으로 나가야 한다.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민족이라는 허상을 지우고, 피부색과 출신국가에 기반한 편견을 의식적으로 깨 나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추아가 말하는 핵심이자, 『제국의 미래』가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다.

 

 

※ 이 글은 2022년 1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갱신된 사실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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