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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백제는 왜 하필 웅진으로 천도하였는가?

by 김고기 님 2023. 5. 5.

<목차>


  1. 왕도로서 기반 시설이 전무한 웅진
  2. 한성 구원군과 웅진 천도
  3. 웅진 천도의 주체, 수촌리 유적

 

 

백제의 남천, 즉 고마성으로의 천도는 개로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주는 475년 9월, 신라의 구원군과 함께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개로왕이 죽는 등 왕실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 달인 10월, 문주는 웅진 고마성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문주왕이 왜 웅진으로 천도하였는가를 직접적으로 밝힌 사료는 없다. 그저 배경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가장 먼저 고려할 수 있는 요소는 고구려의 침략에 따른 한성의 폐허화, 그리고 여전히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보다 안전한 지역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웅진인가?'라는 점이다.

 

1. 왕도로서 기반 시설이 전무한 웅진

 

웅진은 지금의 충남 공주 지역이다. 이곳에는 여기가 과거 백제의 도읍이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가 폭넓게 남아 있다. 고마성(웅진성, 지금의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 유적이 연구·조사되었음에도 이들은 대부분 백제가 고마성으로 천도한 이후의 것이란 특징이 있다. 즉, 백제가 이곳으로 천도하기 전의 유적은 간헐적이고 산발적으로만 발견될 뿐, 그마저도 눈여겨 볼만한(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은 없다. 이는 백제가 천도하기 전까지 이곳이 왕도로 선정될 수 있는 기반 세력이나 시설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서울이 함락되고 나서 새 수도를 부산이나 대구가 아닌 군 정도 지역으로 옮긴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국가의 중심인 수도를 선정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외국의 침입에 따른 위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그럴 만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근래의 통설은 일반적으로 웅진의 지리적 조건, 즉 북으로 금강이 자리하고 더 위로 차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대고구려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라는 점을 든다.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지만, 기반 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웅진이 왜 하필 도읍으로 선정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
<그림 1>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의 모습. 고마성(지금의 공산성)은 금강과 성벽을 접하고 있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처럼 웅진이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도읍이었음에도, 왜 일국의 왕도로 선정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하다. 그런데 백제의 웅진 천도가 단순히 웅진이 가진 지리적 조건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지방 세력과의 상관관계에서 이해할 경우 나름의 설명이 가능하다.

 

2. 한성 구원군과 웅진 천도

 

475년 9월,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될 무렵 문주는 남쪽으로 내려가 구원군을 모집했다. 그 정황에 대해 『삼국사기』는 문주가 신라의 구원군 1만과 더불어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도읍이 함락되었고 개로왕이 피살되어 왕좌가 비어 있기에 그가 왕위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비록 『삼국사기』에는 구원군을 "신라병"이라고만 기록했지만, 이들 구원군에는 백제의 각 지방에서 동원된 군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란 점이다. 수도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구원군 동원은 비단 동맹국뿐만 아니라 자국 지방까지 포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세력이 다음의 천도지인 웅진 지역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천도지인 고마성 지역은 금강을 경계로 한 공주 중에서도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이 남쪽 지역에는 먼저 언급한 것처럼 천도하기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유적이 매우 드물고, 천도 후에 만들어진 유적은 흔하게 남아 있다. 반면에 웅진의 주변 지역, 즉 동북쪽으로 천안과 청주, 그리고 동남쪽으로 논산, 서남쪽으로 부여, 서쪽으로 보령 지역에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는 475년 이전에 조성된 유적이 조밀하게 남아있다. 이들 유적은 해당 지역에 규모가 큰 세력의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 아마도 백제는 이들 지방 세력을 구원군으로 소집하였을 것이다.

[1] 동성왕과 의자왕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백제는 유난히도 왕권이 약한 국가였다. 정설은 4세기 근초고왕 시절 중앙집권을 수립했다는 것이나, 최근에는 5세기 또는 그 이후까지도 연맹왕국으로서 성격이 유지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백제의 중앙정부와 지방 세력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었는가는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다.

 

3. 웅진 천도의 주체, 수촌리 유적

 

백제의 웅진 천도와 관련해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2003년에 발굴되어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이라 불리는 공주 수촌리 유적이다. 그러나 수촌리 유적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할 무렵의 정황과 연계시킬 경우, 이 유적을 도읍지인 웅진에 포함하기는 어렵다. 수촌리 고분군은 금강의 북쪽에 자리한다. 이는 수촌리 유적이 백제의 웅진 천도 전야(즉, 한성 함락)라는 시간 축에서 볼 때, 도읍에 포함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수촌리 유적은 광의적으로 웅진에 포함할 수 있으나, 웅진 지역 유적 잔존 현황, 그리고 금강의 존재를 고려할 때 도읍지 내의 유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고마성-수촌리 유적 지도
<그림 2> 고마성과 수촌리 유적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물리적 거리, 유적 분포, 금강의 존재 등을 고려했을 때 수촌리 유적을 고마성 내, 또는 고마성을 수촌리 유적 내의 장소로 보기는 어렵다. (자료: Google 지도)

 

수촌리 유적은 6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무덤은 중앙에 반경 약 10여m의 빈터를 두고 주변에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다. 수촌리 유적의 조성 시기가 백제의 웅진 천도 이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각각의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화려하다. 금동관모 등의 장식품에서부터 마구, 무기, 토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특히 눈여겨볼 것은 5기의 분묘에서 공통적으로 사치품, 위세품으로 판단될 수 있는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위세품 중에는 중국제 청자로 밝혀진 유물도 포함되어 있는데, 따라서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이 매장물을 직접 생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품목은 중앙정부가 대중국 교섭을 통해 확보한 뒤, 그것을 다시 지방 사회에 하사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접근은 금동제 관모 등 여타 위세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고로 수촌리 고분군에 각종 위세품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이 오랜 기간 백제의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그 권위를 유지하던 존재[2]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웅진 천도 역시 이들 세력에 의해 유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일각에서는 이 수촌리 유적을 마한 54국 중 하나인 '감해비리국'의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대단한 규모와 부장품에서 동성왕을 암살한 백씨 세력의 흔적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
<그림 3> 금동신발, 금동관, 환두대도 등 귀중한 유물이 쏟아진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의 현장 사진.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경향신문)

 

결국 백제는 한성이 더 이상 도읍지로서 역할을 할 수 없고 지방에서 동원된 군대가 한성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구원군과 더불어 남쪽으로 천도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수도는 지방에서 동원된 군대와 유기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으면서, 지방 세력의 상호 간 역학(견제) 관계가 고려되었을 것이고, 때문에 오히려 특별한 기반 세력이 없는 지역, 즉 웅진이 선정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웅진의 지리적 조건도 고려되었을 테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지방 세력이 중앙정계에 등장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백제의 웅진 천도는 이처럼 이들 여러 지방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치밀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끝)

 

 

<참고문헌>


이기환, 2008,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경향신문》.
이남석, 2007, 『百濟文化의 理解』, 서경문화사.
이형구, 2004, 『백제의 도성』, 주류성.
이훈, 2003, 『公州 水村里遺蹟』,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 이 글은 2010년 8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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