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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문학

[러시아 문학] 체호프의 작품 세계: 작가는 재판관이 아니다

by 김고기 님 2024. 1. 14.

안톤 체호프의 초상
<그림 1> 체호프의 초상. (그림: 오시프 브라즈, 1898,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80×120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체호프가 열어낸 새로운 문학 세계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유난히 많은 분량을 할애받는 작가다. 이는 체호프의 작품이 워낙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전과는 다른 문학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즉, 체호프는 그간의 러시아 문학사를 살펴보고 정리하는 마디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가인 셈이다.

 

단편 소설의 거장으로서 체호프의 작품에는 동시대 여타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먼저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뒤섞이거나, 사건이 존재함에도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기묘한 서술이 나타난다. 극단적으로는 사건이 아예 없기까지 하다. 또 별것 아닌 사건을 침소봉대하는가 하면, 심각한 사건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취급하기도 한다. 사건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당대 리얼리즘의 영향을 생각하면 가히 파격적이다. 그는 이러한 기법을 통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거나 작품 자체를 순식간에 끝내버리곤 했다.

 

근대 소설의 거장으로서 문학계에 큰 파란을 체호프의 세계는 이처럼 명령이 없는 무념무상의 세계였다. 이 말은 즉 체호프 이전의 문학은 명령이 있는 유념유상의 세계였다는 것과 상통한다. 체호프는 주로 불가지론의 입장에 섰고, 혁명 전야의 혼돈기에 대다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끝까지 꺼렸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 체호프 이전의 문학은 교훈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또 그래야만 훌륭한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체호프는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

 

그렇다면 체호프는 왜, 어떻게 이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일까?

 

먼저 그의 원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답이 없으면 없다고,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자연과학자의 입장은 톨스토이와 같은 사상가의 삶과는 대비되는 면이 있었을 테다.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시베리아·사할린 여행이었다. 범죄자들의 유배지인 황량한 사할린에서 그는 비인간적인 삶과 일상적인 매춘, 그리고 끊임없는 기아를 보며 인간의 극단을 목격한다. 이 여행 이후 체호프의 작품 세계는 톨스토이를 비롯해 당대의 주된 사조였던 비판적 리얼리즘과 완전히 단절된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정말로 ‘리얼’을 담보하고 있는지 회의하게 된 것이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그림 2>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사할린 섬』(2013). 체호프가 사할린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수필집 『사할린 섬』에는 체호프의 사회 비판적인 면모와 동시에 자연과학도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할린 섬』은 한동안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다가, 2013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주도로 출간될 수 있었다.

 

그는 리얼리즘의 현실을 모르는 공허한 훈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작품에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렇듯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작가란 세상을 꿰뚫고 판단을 내려주는 재판관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재판관이 아닌 증인으로서 사실을 서술하는 것, 체호프의 문학 세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 이 글은 2019년 3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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