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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문학

[러시아 문학]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에 나타난 반인(half-man) 모티프의 특징

by 김고기 님 2023. 8. 22.

『프랑켄슈타인』, <가위손>, 『아기공룡 둘리』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개의 심장을 지닌 인간!

 

 

<목차>


  1. 책 소개
  2. 들어가며
  3. 정체성과 사회성
  4. 초월성
  5. 주체성
  6. 나오며

 

 

불가코프&#44; 개의 심장의 표지
<그림 1> 불가코프의 소설 『개의 심장』의 표지(2013, 정연호 옮김, 열린책들).

 

<책 소개>

혁명의 모순과 과학의 맹점을 파고든 ‘불가꼬프적’ 상상력의 진수 『개의 심장』.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 샤릭. 인간들이 퍼부은 갖은 모욕과 돌팔매질, 펄펄 끓는 물 세례로 만신창이가 된 개의 앞에 한 신사가 나타난다. 그가 내어놓은 소시지에 미혹되어 신사를 따라간 샤릭은 병원 겸 실험실로 쓰이는 그의 아파트에서 배불리 먹으며 귀족과 같은 생활을 만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랑자가 사망하자 졸지에 실험대 위에 눕혀진 샤릭, 그는 유럽 최초의 개인간, 샤리꼬프로 거듭나는데...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1. 들어가며

 

흔히들 인문학을 ‘인간의 조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무엇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분할 수 있도록 하며, 또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과학의 발전으로 신의 존재가 점점 축출되고, 인류가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컴퓨터와 로봇의 발명 이후 이제 이 물음은 사유를 넘어 당면한 현실이 되었다. 반인(half-man)을 만드는 게 정말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인이란 인간의 조건과 인간이 아닌 것의 조건을 함께 갖춘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반인에 대한 접근은 곧 인간의 정의에 관한 접근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소설 『개의 심장』에서 샤리코프 역시 이 같은 반인이다. 개 샤릭은 교수 필립에 의해 인간의 형상을 갖게 되고, 이 샤리코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개의 심장』의 주된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반인으로서 샤리코프의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개의 심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특히 반인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반인의 존재가 작품의 주제의식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애니메이션 개의 심장 포스터
<그림 2> 2012년 인도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개의 심장>의 포스터.

 

2. 정체성과 사회성

 

사회적 존재로서 반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반인 모티프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다. 작중 반인들은 반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을 겪는다. 영국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러한 차별과 냉대는 영화 <가위손>(1990)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에드워드는 그의 가위손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차별받는다. 가위손의 유용성을 인식한 사람들은 이내 그를 우대하지만, 결국 그의 기술을 써먹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그가 쓸모없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다시금 그를 차별하고 따돌린다.

 

사람들에게 쫓기는 괴물의 모습
<그림 3> 영화 <프랑켄슈타인>(1994)에서 사람들에게 쫓기는 괴물의 모습.

 

그런데 『개의 심장』에서는 반인의 정체성이 주된 요소로 부각되지 않는다. 샤리코프 역시 반인의 정체성보단 오히려 그 자신을 인간, 나아가 프롤레타리아라고 여긴다. 작중 주변 인물들과 사회는 샤리코프를 반인이라고해서 괴롭히거나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공직까지도 준다. 의사 이반의 괴롭힘 역시 반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괴롭힘이 아니라 그가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그가 저지른 악행 자체에 대한 보복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의 심장』에서의 반인 모티프는 기존의 통념적인 반인의 역할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샤리코프의 반인 모티프는 한국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가 보여주는 반인 모티프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이 존재한다. 먼저 동물-인간이라는 점이다. 샤리코프는 명확히 개라는 원형을 갖고 있고, 둘리 역시 공룡이라는 원형이 존재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1]이나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창조물인 것과는 대조된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차별과 억압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리의 공룡 정체성은 초반에 잠깐에 언급될 뿐[2],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은 제시되지 않는다. 나아가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행동한다. 또 집주인을 매우 괴롭힌다. 샤리코프는 필립에게 자신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쉬본제르에게는 자신이 병역 면제 대상임을 설득한다. 둘리는 자신에게 할당된 과도한 집안일에 반항을 하며, 자신의 기구한 삶에 대해 한탄한다.

[1] 괴물은 여러 시체를 기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원형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원형의 정체성이 전혀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원형이 없다고 분류했다.

[2] 둘리를 만나는 인간들은 둘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거나 논쟁하기는 하지만("개야!", "아냐, 너구리야.") 이는 모두 단편적인 일화일 뿐, 둘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로운 사건을 만들지는 않는다.

 

아기공룡 둘리에서 표현된 고길동의 모습
<그림 4>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에서 표현된 성인 군자 고길동 선생의 모습.

 

이렇듯 『개의 심장』과 『아기공룡 둘리』에서는 공통적으로 반인의 정체성이 전면에 제시되지 않고, 동시에 반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작품의 반인 모티프가 가지는 역할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러티브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내러티브 안에서 반인이 어떤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초월성

 

인간과 다른 반인의 면모는 우선 그들의 외모와 외형에서 드러나지만,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는 그들의 능력에서도 제시된다. 괴물은 어마어마한 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둘리는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도 조종하는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얼음을 조각하고 문을 따내는 에드워드의 가위손 역시 분명히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은 아니다.

 

『개의 심장』이 여타의 반인 모티프와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 여기 있다. 작중 샤리코프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는커녕 평범한 인간인 이반에게조차 쉽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필립의 엄포에 왜 자신을 학대하느냐며 갑자기 울상 짓는 모습이라든가, 술에 취해 망발을 일삼는 장면은 샤리코프가 물리력뿐만 아니라 정서적·정신적으로도 보통의 인간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련 시기 만들어진 영화 개의 심장의 포스터
<그림 5> 소련 시기 만들어진 영화 <개의 심장>의 포스터. 포스터 가장 아래 목이 졸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샤리코프다. 이렇듯 샤리코프가 인간에게 당하는 모습은 포스터에 제시될 정도로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개의 심장』에서 반인 모티프는 그것이 제시하는 인간다움과 인간답지 않음 중에서 전자에 훨씬 큰 무게감이 실려 있다. 그 인간다움은 인간으로서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괴물이나 에드워드의 인간다움(사랑, 고독, 자아 등)이 비극성과 안타까움을 더해주는 요소라면, 샤리코프의 인간다움(사기, 기만, 강간 등)은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추접하고 추악한 모습이다. 즉, 반인 모티프를 통해 『개의 심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샤리코프를 여타 일반적인 반인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에 무언가 더하고 빠진 존재가 아닌, 그 자체를 인간에 대한 특정한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주체성

 

다름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받는 반인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한다. 괴물은 추악한 자신을 만들어낸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을 증오한다. 하지만 그가 죽자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에드워드는 마을 사람들의 배척과 편견을 뚫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와 비교하면 둘리와 샤리코프의 주체성은 매우 약하다. 둘리가 자신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엄마와 관련된 것에 국한되며, 그마저도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샤리코프는 그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 자신이 개였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민과 성찰의 결과가 아닌, 쉬본제르가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캐릭터가 아닌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보면 이런 경향은 더욱 잘 드러난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태이지만, 액자형 구조로 내적 서사를 이끄는 것은 괴물의 행동이다. <가위손>은 영화 특유의 관찰자 시점을 감안하더라도 명백히 에드워드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에드워드가 주인공이다. 『아기공룡 둘리』 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흐름을 이끄는 것은 고길동이 아닌[3] 둘리와 친구들이다. 이에 비해 『개의 심장』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샤리코프가 아닌 필립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혼돈적이기는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을 중심으로 샤리코프가 아닌 필립의 생각과 판단이 이야기를 이끄는 축이다. 샤리코프는 그 과정에서 다만 사건과 갈등의 객체로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3] 물론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의 특성상 고길동이 흐름을 이끄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극 전체로 본다면 분명히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둘리다.

 

영화 아이 로봇의 한 장면
<그림 6> 반인의 주체성과 정체성 문제를 전면에서 다루었던 영화 <아이, 로봇>(2004). "로봇이 교향곡을 쓸 수 있어? 로봇이 빈 캔버스를 아름다운 명작으로 채워낼 수 있냐고?", "넌 할 수 있어?"

 

『개의 심장』에서 나타나는 반인 모티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창조된 존재로서, 또는 ‘존재하는’ 존재로서 반인은 그 자체의 존재 의의 때문에 많은 경우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샤리코프는 탄생부터 갈등,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객체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5. 나오며

 

『개의 심장』에서 샤리코프는 필립에 의해 탄생한 반인이지만, 여타의 반인과는 크게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반인으로서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가진 존재다. 또 사회적 존재로 인식되는 데 장애물이 없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가진 존재다. 셋째로 인간을 초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단점을 그대로 비친다는 점에서 인간성을 가진 존재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이 이야기를 이끄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객체성을 가진 존재다.

 

주요 작품별 반인의 초상
<그림 7> 작품별 반인의 초상. 왼쪽부터 <프랑켄슈타인>(1994)의 괴물, <가위손>(1990)의 에드워드, <아기공룡 둘리>(1987)의 둘리, 『Hear of a Dog』(1994)의 샤리코프.

 

작품별 반인의 특성 비교
<표 1> 작품별 반인의 특성 비교.

 

여타 작품이 제시하는 반인의 특성에 비해 샤리코프의 반인은 전체적으로 인간다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반인 모티프 자체는 『개의 심장』의 핵심적 요소가 아니며, 개-인간으로서 샤리코프는 괴물이나 에드워드와는 달리 다른 요소로 갈음되더라도 충분히 변함없는 극의 전개가 가능하다. 즉, 『개의 심장』이라는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 특정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샤리코프가 반드시 반인으로서 샤리코프일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환유적 세계다. 괴물과 에드워드 역시 특정한 요소를 환유한다. 그러므로 소설 내 중요 모티프가 그 자체로 극을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환유적 성질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개의 심장』에서 환유적 속성은 필립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우화의 주인공이나 의인법의 대상이 아닌 반인으로서 샤리코프에게는 정작 반인적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샤리코프의 행적은 “반인이기 때문에 ...”가 아닌 “반인인 샤리코프가 ...”로 접근해야 하며, 그가 가진 인간과의 유사성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개의 심장』의 흐름 속에서 이것이 특정한 인간상에 대한 은유임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은유성이야말로 샤리코프가 가진 가장 큰 특성이다.

 

 

※ 이 글은 2015년 5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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