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7년 3월에 게시된 프리뷰로, 당시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했던 글을 블로그를 이전하며 수정·보완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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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Planescape: Torment)의 정신적 후속작인 <토먼트: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Torment: Tides of Numenera)가 오랜 기다림을 거쳐 드디어 출시되었습니다. 2013년 처음 킥스타터에서 모금이 시작된 이후 4년 만입니다.
먼저 전작인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1999)를 곱씹어 봅니다.
근래 미디어 믹스/미디어 프랜차이즈가 대세입니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세계가 시각화되거나, 일방적으로 전달받던 세계를 직접 탐험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일입니다. 물론 한 콘텐츠가 다른 형식으로 전개되면 본래의 매력이 줄어드는 경우 또한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작품이 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애니메이션이든 그 형식에 정말 딱 맞아서, 다른 매체로 바꾸는 게 가능이나 할까 싶은 작품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언제나 예외 없이 명작이었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이하 <토먼트>)는 정확히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완벽한 게임, 게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가능할까 싶은 작품.
사상 최고의 게임 <토먼트>
<토먼트>는 1999년에 출시된 RPG 게임으로,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의 친척뻘 되는 작품입니다. <게임스팟>이나 <IGN> 같은 메이저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게임 관련 매체들이 하나같이 역사상 최고의 RPG, 혹은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손꼽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사실 <토먼트>는 발매 당시로써도 그래픽이나 시스템에서 획기적인 요소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RPG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부분은 친척인 <발더스 게이트>(1998)나 <네버 윈터 나이츠>(2002)에 비해 훨씬 못 미쳤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게임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언급되는 이유는 전투를 아예 버려도 상관없다 싶을 정도로 훌륭한 스토리, 더불어 완벽에 가까운 세계관 전달과 압도적인 분위기 연출 덕택입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시체 안치소에서 주인공이 깨어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름도 모릅니다. 그의 몸 곳곳에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데,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옆에는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는 말하는 해골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 주인공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자신은 누구인지, 자신은 왜 죽을 수 없는지를 찾아 떠나는 모험이 <토먼트>의 핵심 스토리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몰입이 잘 되는 편이 아닌데, <토먼트>만큼은 언제나 생생합니다. 정교하고 섬세하게 짜인 세계관 속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지는 상황이 너무도 인상 깊었던 까닭입니다. 특유의 SF 감각과 정밀한 2D 텍스쳐가 만들어내는 그래픽 역시 화려한 최신 게임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강철 골렘 코우크스메탈을 처음 봤을 땐 그 연출과 캐릭터에 한참을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게임이 최고로 칭송받는 건 단순히 스토리가 좋아서 뿐만이 아닙니다. 훌륭한 스토리가 철저하고 정교하게 제작된 세계관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웬만큼 스토리 좋다는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죠. 그래서인지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고 단순히 떠돌며 대화만 해도 머릿속에 재밌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특히 <토먼트>의 배경 자체가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이기에 다양한 철학·정치 사상에 대한 사고 실험이 이루어지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등장하는 여러 당파 역시 역사적으로 실존했었거나 여전히 존재하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요.
게임을 진행하며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선택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다시 사건과 이야기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그 선택이 이름 없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게 됩니다. 플레이어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곧 이름 없는 자의 성향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게임을 마무리할 무렵에는 플레이어와 이름 없는 자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어지죠.
의식적으로 역선택을 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충실히 선택했다면, 이 게임을 통해 드러나는 성향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성향을 정말로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이 게임의 가장 유명한 대사도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일 테고요.
드디어 나타난 "정신적 후속작"
2012년 즈음 <토먼트>의 후속작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전 세계의 RPG 팬들이 환호를 보냈습니다. 특히 <디아블로> 시리즈의 대성공 이후 RPG의 양상이 급격히 액션 중심으로 바뀌어 <토먼트>와 같은 텍스트 중심 게임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죠. 킥스타터 모금 시작 이후 10억 원이라는 초기 목표가 6시간 만에 달성된 것도 텍스트 RPG에 대한 팬들의 갈망이었을 겁니다.
<토먼트: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이하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는 <토먼트>의 정신적 후속작입니다. 굳이 "정신적 후속작"이라 칭하는 건 전작과 스토리 차원의 연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작의 소재를 일부 차용한 이스터 에그 수준입니다.) 세계관과 룰 역시 전작의 <플레인스케이프>와 AD&D를 벗어나 <누메네라>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메네라>의 작가가 <플레인스케이프>의 작가인 몬테 쿡입니다.
그 외 <토먼트>에 참여했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토먼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전한 방식, 즉, 세계관 전달과 분위기 연출, 그리고 철학을 계승하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죠. "정신적 후속작"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러니까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는 이름 없는 자의 이야기를 그토록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형식과 매체를 계승하는 작품입니다.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는 <누메네라>에 기반을 둔, 10억 년 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엔 죽음을 초월하게 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몸을 만들고 옮겨 다니며 죽음을 피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변화하는 신(The Changing God)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떠난 몸에는 새로운 의식이 깃듭니다. 처음에 그는 의식이 깃든 예전 몸을 아버지로서 대했으나, 불멸이 그를 타락시킨 탓인지 점점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누군가의 불멸은 세계의 균형을 파괴했습니다. 그 균형을 지키기 위해 비애(The Sorrow)라는 생명체가 깨어납니다. 이 존재의 목적은 오직 죽음을 속인 변화하는 신과 그의 옛 몸들을 근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당신이 떨어집니다. 변화하는 신이 바로 직전에 사용한 몸, 그리고 이미 비애에게 쫓기는 몸. 여기서부터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창조주를 찾아, 또 다른 버려진 몸들을 찾아 세계를 탐험할 것입니다.
전작에서 보여준 촘촘한 세계관 구성과 연출은 이번에도 여전합니다. 세계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두어 시간 정도는 그냥 흐릅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이지만, 죽음과 불멸, 그리고 고통에 대한 테마만큼은 이것이 <토먼트>의 후속작임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버려진 자"(The Last Castoff)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What does one life matter?
한 번의 삶에는/한 생명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한글판 출시!
<토먼트>가 한국에서도 이토록 기념될 수 있었던 건 높은 품질의 한글화 덕이 컸습니다. <토먼트>는 텍스트가 중요한 수준을 넘어 그 자체로 게임이었고, 그만큼 어마어마한 단어와 대사량으로도 명성이 높았었죠. 게임 내 은어 사전을 따로 제공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글화의 가치와 고마움이 더욱 컸던 작품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삼성전자의 업적(?) 중 하나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도 공식 한글판이 출시되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유통사인 H2 인터렉티브를 통해 완전한 한글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역의 품질도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모쪼록 이 게임과 한글판이 모두 잘 되어서, 앞으로도 이런 사례를 자주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lett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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