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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법학

왜 혐연권이 흡연권보다 우월할까? ― 헌법의 단계구조

by 김고기 님 2023. 8. 13.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같은 헌법규범 안에서도 높고 낮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헌법규범에도 핵심적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가 존재하며, 이를 '헌법제정규범 → 헌법핵 → 헌법개정규범 → 헌법률'의 단계구조로 표현한다. 즉, 헌법핵은 헌법개정으로는 바꿀 수 없을 만큼 핵심적인 것이며, 이에 비해 헌법률은 헌법개정으로 바꿀 수 있기에 헌법핵이 헌법률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정리한 헌법의 단계구조론
<그림 1> 칼 슈미트가 정리한 헌법의 단계구조론. 헌법의 본질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이고, 이 본질은 개정될 수 없다. 즉, 국민의 기본권을 파괴하는 헌법 개정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절차적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헌법'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헌법의 정의를 통해 국가권력규범이 궁극적으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능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중 특히 권력분립주의는 개인에 비해 초월적 권능을 지닌 국가권력을 상호 견제시킴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헌법규범 안에서도 우열관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기본권과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금연구역 설정은 개인의 행복추구권에 대한 침해라고 볼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통해 확인해보자.

 

금연구역 설정은 개인의 행복추구권 침해일까?

 

사건은 2002년, 「국민건강증진법」 제9조 개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법의 개정 및 「국민건강증진법 시행규칙」 제7조(해당 조항은 2011년 개정되어, 이후로는 제6조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의 시행에 따라 학교, 의료기관, 공연장, 식당, 만화방 등 거의 모든 시설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되거나, 금연구역 설정에 관한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이에 한 시민이 이것이 행복추구권에 대한 침해라며 위헌소송을 제기한 것이다(헌재 2004. 8. 26, 2003헌마457).

 

금연 표지판
<그림 2> 금연 표지판. 「국민건강증진법」 제9조의 개정으로 대부분의 공동이용시설이 금연구역이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헌법재판소는 혐연권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헌재 결정의 요지는 흡연권은 사생활의 자유를 핵으로 하지만, 혐연권은 사생활의 자유뿐 아니라 생명권까지도 연결되므로 흡연권은 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즉 개인의 기본권 간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위계질서가 있는 기본권끼리 충돌할 경우 하위의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위기본권우선의 원칙'이다.

 

유사한 사례는 아니지만, 관련하여 꼭 알아두어야 할 판례도 있다. 유신의 잔재, 「헌법」 제29조에 대한 헌법소원이 바로 그것이다(헌재 1995. 12. 28, 95헌바3). 이 조항은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등이 훈련 중 발생한 손해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는 국가 등에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규정한 것으로, 월남전 당시 쏟아져나오던 희생자들에게 박정희 정부가 보상을 해주지 않기 위해 개정한 「국가배상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배상법」의 해당 조항은 당연하게도 위헌 판결을 받는데, 박정희 정권은 위헌심판을 피하고자 유신 선포 후 이를 아예 헌법으로 만들어버린다. 이후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청구인들은 이 조항이 상위의 규정인 헌법 제10조(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국민의 불가침적 인권에 대한 규정), 제11조(평등의 원칙에 대한 규정)를 위반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헌재는 헌법규범은 헌법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청구를 각하하였다.

 

 

※ 이 글은 2015년 4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갱신된 사실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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