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가지고 있던 책 대부분을 처분했다. 전자책이 있는 건 전자책으로 다시 샀고, 없는 건 처분 전에 스캔했다. 하지만 스캔이란 게 결과물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 가능하면 전자책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막상 이 전자책에도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 바로 인용 시 정확한 페이지를 표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전자책은 해상도와 글자 크기 등에 따라 페이지가 그때그때 재구성되기에, 일관적인 페이지를 구성할 수 없다.
이런 고민을 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영문 검색어로도 관련 질문이나 스레드가 꽤 잡힌다.
현행 규정: 전자자료 인용 방식 준용하기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관이나 대학은 전자책 인용 규정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을까? 사실 인용(참고문헌) 규칙이란 게 워낙 사람 따라 다르고 학회 따라 다르고 학문 따라 다른 거지만, 일단은 대괄호 안에 전자 버전임을 명시하고 페이지는 그냥 비워두라고 지침을 잡고 있는 듯하다. 대학에서는 업계 표준이라 할 수 있는 APA나 밴쿠버, 시카고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준용하고 있는데, 그 예시는 아래와 같다.
각주
1. 김영범, 신동호, 북한 문예론 [eBook] (서울: 톨스토이, 2001), http://www.tolstoe.com/newebook/mall/ebook (2001년 12월 8일 검색).
→ 변형된 시카고 스타일
2. 김영하, 나는 나를 포기할 권리가 있다. (서울: 문학동네, 1996), 1장 마라의 죽음, http://www.전자책.com/김영하.
→ 변형된 시카고 스타일
3. 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 [전자 버전], 안진환 역, 민음사, 2011.
→ 성균관대학교 가이드
4. Lefebvre P. Molecular and genetic maps of the nuclear genome [Internet]. Durham(NC): Duke University, Department of Biology; 2002 [modified 2002 Dec 11; cited 2003 Sep 5]. Available from: http://www.biology.duke.edu
→ 밴쿠버 스타일
5. O’Keefe, E. (n.d.). Egoism & the crisis in Western values. Retrieved from http://www.onlineoriginals.com
→ APA 스타일(6th ed.)
우선 당연히 들어가야 할 기본적인 정보를 제외하고 전자책을 인용할 때 추가로 들어가는 정보로는 ① 자료 형태(전자책 표기), ② URL 혹은 URI, ③ 접속일 또는 검색일이 있다.
곰곰이 보면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일반적인 전자자료를 인용할 때 요구되는 정보와 꼭 같다. 그런데 전자책의 특성을 생각해볼 때 URL과 접속일은 전혀 의미가 없다. 출판된 전자책은 일반 도서와 같이 통일된 판본이 존재하는 제품이다. URL이라고 해봤자 전자 저널과는 달리 그저 제품을 파는 서점(유통업체)의 홈페이지일 뿐이고, 10년 전에 접속했든 오늘 접속했든 같은 판의 전자책은 같은 내용을 담는다. 전자책의 특성과 용도에 대한 고민 없이 전자 자료 인용 규칙을 그대로 붙여넣은 것이다. 물론 전자 자료 인용 규칙도 멀쩡하지 않다는 게 함정이다.
여하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시된 정보로는 절대 인용 부분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전자 자료의 특성을 이용해 검색 기능을 쓰면 되겠지만, 간접 인용이라든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저자가 저술한 경우 상당히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합리적인 대안은 2처럼 등장 챕터를 표기하는 것. 이것도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예 안 쓰는 것과는 비교 대상이 아닐 듯하다.
이미 제시되었던 대안: 표준 페이지 제공하기
그런데 사실 이미 명확하고도 재밌는 대안이 나와 있다. 아마존의 킨들은 화면 구성과는 별도로 실제 페이지를 표시해주거나 인용 붙여넣기를 실행할 때 자동으로 종이판 페이지를 계산해 같이 붙여준다. 2012년엔 기능은 있어도 안 되는 책이 종종 있었는데, 최소한 2016년 무렵에 내가 다룬 책 중엔 이게 안 되는 건 없었다.
그 외 '로고스 바이블'과 같은 소프트웨어도 종이판 페이지를 확인하는 기능이 들어가 있다. 먼 훗날 종이책이 완전히 전멸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표준 판본을 만들어 표준 페이지를 제공하면 될 테다. 의미 없이 보는 책이 아니라면 인용 표시는 책이라는 매체가 결코 포기해선 안 되는 역할이다.
새 생태계를 만든다는 건 이 정도 정성과 강박이 없으면 못 하는 일이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건 기존 생태계도 망치고 새 생태계도 망친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한국 서비스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어 전자책의 인용 표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2와 3의 방식을 변형해 따르기로 했다.
각주
1. 김희영, 2013, 『이야기 중국사 3』 [eBook], 청아출판사, 2. 명나라 시대: 정난의 변.
처음에는 종이책과 페이지를 동기화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으나 그 과정이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었다. 특히 반응속도가 느린 전자잉크(E-Ink) 단말기로는 상당한 시간 낭비가 생겼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만 쓰되, 챕터를 명시하는 쪽이 가장 합리적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건 개인 작업 한정이고, 외부로 보낼 땐 아마 동기화시키거나 종이책을 확인한 후 정확한 페이지를 써서 보낼 듯하다.
가장 좋은 경우는 국내 전자책 출판사–유통사들이 아마존처럼 페이지 표시 기능을 도입해 주는 거겠지만... 사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빈사 상태인 한국 출판시장에서 몇 명이나 쓸지 알 수 없는 이런 기능을 도입할 여력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아직 한국 대학 등지에는 전자책에 대한 기피 혹은 무시 풍조가 있는 듯하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을까. 이 인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색하던 도중 교수가 전자책 인용을 인정해주지 않았단 이야기를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당 전자책은 종이책과 완전히 동일한 버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일단 전자책을 한 번 써보니 꽤 편해서 웬만해선 다시 종이책을 사 모을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소소한 불편함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과연 한국에 전자책 붐은 올까? 안 온다.
※ 이 글은 2019년 2월 이글루스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새로운 편집을 더해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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